BASEMENTZEROFLOOR
- Prologue -
언젠가 세상이 돌과 바람과 풀뿌리에 잡아먹히고 우리가 만들어 온 모든 것이 끝나는 날이 올 것이다. 서로에게 박수를 쳐 줄 사람도, 돌을 던질 사람도 남지 않아 쌓아온 흔적은 삭아가고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삭막한 것들이 뻗어나가면 젊고 어린 우린 그 장면을 직접 볼 용기가 있을까. 세상에 인간보다 빈 침대가 많아진다면, 그 침대에 누워있던 인간들이 그대로 모두 사라져 버린다면 젊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 밖에 남지않은 세상이 어떻게 흘러갈까. 우리는 그렇게 아무도 없는 세상을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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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이제 끝나가는 것 같다. 끝나가는 세상에 남은 것은 거의 없고, 남겨진 것들은 가득하다. 물론 별로 의미 없다. 어느 날이었다. 특별하지 않은 어느 날에 필연적이지 않은 이유로-그 이유를 어떤 방식으로도 추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다섯 명의 사람만 남겨두고 모든 인간이 사라졌다. 그리고 우연히도 그 다섯은 나름대로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그들은 그저 그런 일상에서도 자신들이 살아가는 법을 잘 몰랐다. 물론 젊다는 말로도 포장할 수 없는 무능함은 아니지만, 비교적 확실한 세상에서도 젊은 그들은 나름대로 살아가는 것이 힘겨웠다. 누군가 자신에게 명령질을 한다고 느끼면 기꺼이 즐거워할 사람은 많지 않다. 물론 가끔 있기야 하겠지만… 그러나 대부분은 그것을 따르는 편이다. 타인이 친히 발로 밟아 터놓은 길, 타인이 자신 있는 메뉴만 채워놓은 식당 메뉴판과 타인이 쓰고 타인이 묶어 타인이 꽂아놓은 책들이 우리 삶의 역사를 쌓아온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내 이름도, 내가 앓는 병의 이름도, 내가 사랑하는 어느 명사도 모두 타인의 손이 한번은 쓰다듬고 지나갔다. 내 것에 자국을 남긴 그들이 없어지더라도 자국 자체는 잘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나름대로 힘들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끝나가는 이 세계는 어찌 보면 새로운 세상이다. 그들은 세상을 새롭게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갈 기회가 생겼다. 그들은 이 세상도 나름대로 힘들겠지만, 적어도 내 몸에 남은 타인의 냄새 정도는 지울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다.
“저희는 이제 어떻게 될까요?”
“나도 모르지. 어차피 뭐 세상에 사람도 없고 뭐 헛짓이나 하다 죽겠지.”
“죽고 싶지 않은데요.”
“그럼 살 방법을 찾아야지.”
“술이나 마실까요.”
우연히 만나 썩 건설적이진 않은 대화를 조금 나누던 둘은 편의점에서 맥주 몇 병과 음식을 주워 들고 자신들이 자주 가던 작은 방으로 돌아갔다. 소시지를 데워 맥주와 함께 먹던 그들은 처음에는 과학적으로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지에 대해 논쟁을 시작했다. 결국 결론은 어차피 말도 안 되는 일이고,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취기가 조금 오르자 그들은 자신들이 언젠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늘어놓았다. 큰 꿈부터 사소하게 생각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한 일들까지. 둘은 서서히, 구체적으로 희망 사항을 떠들며 웃기 시작했다. 정말 시시콜콜한 대화였다.
그 무렵, 한 사람은 고향에 있는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며 인생의 마지막 사색을 펼치고 있었다. 우연히 남아있는 인간을 마주친 누군가와는 달리 그는 세상에 인간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넓고 삭막한 도시에 혼자 남겨졌을 뿐이었다. 인간이 하나밖에 없는 세상을 충분히 둘러본 그는 공책과 평소에 아끼던 만년필을 들고 빌딩 옥상에 올라왔다. 새로운 세상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과 사라진 것들에 그저 동조해 보려 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쉬운지. 그것은 지극히도 주관적인 판단이다. 고고한 인간들은 언제나 삶을 포기하는 것을 별의별 이유를 가져다 비판해 댔으나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진 이제는 변명 따위 할 필요도, 할 수도 없는 잔인할 정도로 주관적인 판단을 내려야 했다.
또 다른 곳에서는 텅 빈 세상을 뛰어다니다 이 새로운 세상을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아 주저앉은 사람도 있었다. 사라진 수많은 것들에 나의 소중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쓸모없지만 잔뜩 얹혀살던 나머지가 사라졌다는 것 보다 크게 다가왔기에 한참을 울었다. 생각보다 많은 것을 사랑하도록 강요받던 삶이 그 진위 상관없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행복할 수도 있다. 그런 그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사랑이 남지 않은 어둠으로만 보였고, 앞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어떻게 걸어갈지 두려워 한동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 세상은 어둠밖에 없는 것이 아닌 아무것도 없는, 빛을 포함한 그 무엇도 없는 세계다. 방향도 속력도 상관없이 그저 걸어도 부딪혀 넘어질 일 없는 세계다. 그래서 그는 그저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혼란스러운 다른 넷과 달리, 누군가는 세상이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아무도 남지 않은 세상이 나름대로 평화로웠고, 자신이 살아온 공간과 자신이 만졌던 것들은 남아있기에 혼란스럽지도 않았다. 마치 북적거리고 바빠 때려치우고 싶던, 그러나 생계를 위해 그럴 수 없었던 가게와 같은 피곤한 나의 세상에 드나들던 수많은 손님이 더 이상 발길을 주지 않을 뿐이다. 어찌 보면 잘된 일이다. 가축처럼 하늘에서 흩뿌려지는 음식과 분뇨에 잠겨 죽느니 굶어 죽으리라 하던 그에게 이 세상은 대단히 새로운 세상이 아니다. 그저 좀 단순한 세계가 되었을 뿐.
젊은이들은 나름대로 살아간다. 법도, 규칙도, 서로를 억누를 폭력조차도 없는 세계를 살아갈 자신이 있냐는 질문에 우리는 대답할 수 없다. 우리는 인간으로 나에게 채찍을 후려치는 사회의 벽에 달라붙어 숨을 쉬는 인간으로 살아왔다. 동시에 우리는 스스로가 한 마리의 짐승임을 알고 있다. 그것을 숨기고 나를 쳐다보는 타자의 눈을 가리며 살아왔지만, 나를 휘두르는 짐승 같은 욕망에 우리는 입꼬리를 올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혼자 그늘에 앉아 다른 짐승의 사체를 뜯어먹는 행동이 줄 고독함을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언젠가 천천히 모여들고, 스며들고, 각자의 세상을 꾸려나가다 언젠가 겹치게 되는 하나의 세상을 공유할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름대로 살아간다. 세상에 단 다섯 말고 남은 영혼이 없을지라도.